影印本(木板本). - 서울 : 景仁文化社, 1994. - 【韓國歷代文集叢書(1020-1021)】.
2冊 : 23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광정의 시문집이다. 대산 이상정의 동생으로밀암 이재에게 수학하였 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키자, 15세의 나이로 종군하였 다. 이황의 학문을 흠모하여 형 이상정의지도를 받으며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경술(經術)로 천거되어동몽교관 등에 제수되었다. 당시 학자에 따라 구구하던 예설(禮說)을 정리하여 안동지방의 표준 예설이 되게 하였다. 18세기 후반 퇴계학맥을계승한 유학자로 형 이상정과 함께 북송 때 도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유되었다. 아버지는 이태화 (李泰和)이고, 어머니는 재령 이씨로 이재의 딸이다. 1714(숙종 40)년 3월 9일 출생하였다. 부인은 의성 김씨인 김양현(金良鉉)의딸로 김성일의 6세손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 데, 장남은우(堣), 차남은 도(壔)이며, 딸은 장수훈(張壽勛)에게 시집갔다. 종숙부인 이지화 (李志和)의 양자로 출계한 그는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청결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남들보다 빼어났다. 7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0세때 갈라산(葛蘿山)에 올라 시를 지어 원대한 포부를 드러내었다. 18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안동지방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 켰는데,15세의 나이로 응모를 청하여 종군하였다. 또한 밀암 이재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 였고,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문과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1748년 생부의 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렀고, 1753년 암행어사가경술(經術)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41세 때인 1754년 “춘추시대거백옥(蘧伯玉)은 50세에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는데, 나는 어찌 50세 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은거하여 도를 구하는 공부 를 하였다. 1768년 어머니상을 당하여3년상을 치렀다. 1783년 정조가 “이상정의동생 이광 정이 독서하고 수신하여 형의 풍도가 있다.”는 요지로 하교하고서 온릉(溫陵) 참봉에 임명하 였다.1784년 동몽교관에 제수되고, 1785년 사포서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 다. 1789년 7월 25일 대산서당(大山書堂) 만완재(晩翫齋)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안동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청소년기에 고문가(古文家)가되고자 하여 제자백가서 를 널리 박람하였는데, 외숙부 이재에게 수학한 뒤로 학문을 하는 큰 방도를 전해듣고 도를 구하려는 지향을 하여 형 이상정과 함께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였다. 공맹(孔孟)의 경서와 정주(程朱)의 글을 외우고 사색하였으며,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의 지적 탐구는 오로지 독행(篤行)을 위한 것으로 보아 실천을 중시하고, 평상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하였다. 또한 사(私)를온갖 병폐와 악행의 근본으로 여겨 이를 타파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삼았다. 퇴계학통을 계승한형 이상정이 별세한 뒤, 원근(遠近)의 학자들이 모두 이광정에게 귀의하여 가르침을 청했는데, 진실하게노력하여 자신에게 돌이켜 체험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대순전서(大舜全書)』 1책이 있다.
이 문집은 서문이나발문이 없어 간행경위는 알 수 없다. 문집 중 시의 「자경(自警)」은 분 욕(忿慾)을 경계하는내용이다. 서(書) 중「답채제공별지(答蔡濟恭別紙)」는 임진왜란 당시의 어전회의내용, 신묘년 왜국서계(倭國書啓)의 내용을 중국에 알릴 것이냐에 관한 문제, 중신 들의 활동사항 등이요약되어 있다. 「답정수한(答鄭壽漢)」 에서는 여러 중류의 제향을 다하 기에도 여력이 없는데 대중이 행하지 않는 예절로 추복(追服)을 제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뜻을 기술하였다. 「답하사용(答河思庸)」에서는거경지양(居敬持養)으로 주를 삼고 의리 를 따져야 한다는등의 학문하는 방법을 성명하였다. 잡저의 「천이인욕동행이정변(天理人欲同行異情辨)」에서는 천리와 인욕은 절대 섞일 수 없어 음과 양, 밤과낮, 정금(精金)과연철 (鉛鐵), 패도(覇道)와 왕도(王道)의 관계와같다고 하면서, 선악을 병합해서 동행이정(同行異情) 이라고 설명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설(科擧說)」에서는 과거의 폐해가 삼정 (三政)의 문란함보다 더하다고 하면서 사장(詞章)으로 사람을 뽑는 것은 국가와 심성(心性) 모두에 해로울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시정책으로 주가(周家)의학제(學制)에 의거하여 각 도(道)에 상서(庠序)를 설립, 수재를 선발하고 교육시켜 관리로 등용할 것을 제시하였다. 「차기(箚記)」에서는성인 제작한 가례(家禮)란 시대에 맞추어 좋은 대목을 간추린것이므로 전례를 인용하여 예(禮)의 합불합(合不合)을 논란하는 것은 공연한 짓이라 하였다.